경영의 힌트 : 글로벌 시각으로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여 대담하고 착실하게 영역을 넘나들다
경영의 힌트
글로벌 시각으로 시대의 흐름을 포착하여 대담하고 착실하게 영역을 넘나들다
브라더 공업 주식회사
회장
코이케 도시카즈(小池利和)
코이케 도시카즈 프로필:1955년 아이치현 출생.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 졸업 후, 1979년 브라더 공업 입사. 입사 3년째부터 23년간 미국에 주재하며 프린터 사업 확대에 기여. 1992년 미국 법인 이사, 2000년 미국 법인 사장 취임. 2005년 귀국 후, 2007년 브라더공업 대표이사 사장. 2018년 대표이사 회장, 2022년부터 회장.
브라더공업 주식회사
설립:1934년 1월 15일(창업 1908년)/ 자본금:19,209백만엔(2025년 3월 31일 기준)/ 직원 수:42,801명(2025년 3월 31일 기준, 연결)/ 사업 내용:프린터·복합기, 라벨 라이터, 산업용 인쇄기기, 공작기계, 공업용·가정용 재봉틀, 기어모터·기어, 통신 노래방 기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획·개발·제조. 세계 40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 생산거점과 판매거점을 두고 있으며, 해외 매출 비율은 전체의 80%를 넘는 글로벌 기업.
재봉틀 수리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 수차례의 경영 위기를 극복하며 변신을 이루어낸 브라더 공업. 이사 회장 코이케 도시카즈 회장에게 신규 시장 개척, 사장 재임 시절의 경영 전략, 그리고 앞으로의 인재 육성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에 맞는 판매 모델을 구축하다
오오타니 브라더공업(이하 브라더)이라고 하면, 쇼와 세대에게는 재봉틀 회사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지금은 프린팅 기기를 주력으로 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코이케 창업자 형제가 재봉틀의 대량 생산에 성공하여 수입 산업에서 수출 산업으로 전환하였고, 전후에는 편물기를 비롯해 가전, 악기, 타자기 등으로 다각화를 추진했습니다. 전후 일본인의 생활이 아직 풍요롭지 않았던 시절에는 카탈로그를 활용한 방문 판매 기반의 적립 판매·할부 판매 모델이 잘 기능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이후 양판점이 대두하면서, 그때까지 잘 작동했던 방문 판매 비즈니스 모델이 성립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입사한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습니다.
오오타니 입사 3년째인 1981년에는 미국에 부임하셨군요.
코이케 브라더는 분위기가 좋고 소통이 잘 되는 회사였지만, 국내 판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고, 저 자신도 한 단계 성장하려면 일본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오오타니 미국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코이케 프린터 영업이었습니다. 브라더는 1970년경부터 미국의 벤처기업과 공동 개발한 도트 매트릭스 프린터를 판매하고 있었지만, 판매 구역 제약으로 인해 유럽 · 미국에서의 판매는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 애플 등에서 출시된 PC가 미국 시장에 보급되면서, 그에 연결되는 타사의 저가 도트 프린터가 잘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타자기 기술을 활용해 저가격과 높은 인쇄 품질을 내세운 데이지 휠 프린터로 PC용 프린터 시장에 진입했습니다. 이 프린터가 예상 이상으로 히트하여, 전자 타자기와 합쳐 4~5년간 순조로운 판매를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경쟁사가 넌임팩트 방식의 레이저 프린터와 잉크젯 프린터를 출시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벤처기업을 방문하거나 일본 개발진에게 기술 개발을 제안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한편 브라더 전체로는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의 엔고, 국내 방문 판매의 붕괴 등으로 경영 상황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오오타니 미국에서는 어떻게 매출을 늘려 가셨나요?
코이케 처음으로 히트한 것은 테이프에 이름 등을 인쇄할 수 있는 라벨 라이터였습니다. 80년대 말 쯤이었습니다. 또한 1992년에는 기능은 유지하면서 일반 시장 가격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팩스를 출시했습니다. 월 5,000대 팔리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월 5만 대 페이스로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무렵부터 중시하기 시작한 것이 양판점과의 관계였습니다. 당시 오피스 슈퍼스토어(OSS)라고 불리는 사무용품 전문 양판점 3사가 급성장하고 있었고, 최고 전성기에는 전미에 4,000개 이상의 점포를 보유했습니다. 이들 양판점과 좋은 관계를 구축하여 브라더 제품을 매장 선반에 올려놓는 것이 최대 미션이었습니다. 주말에 각 가정에 배포되는 양판점 광고 전단지에 실어 달라고, 제품의 좋은 점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습니다.
제품이 잘 팔리기 시작하자, 양판점으로부터 「다음엔 이런 것을 내놓으면 어떨까요」라는 아이디어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을 일본에 전달하여 상품 개발로 연결했습니다.
오오타니 그야말로 미국에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신 것이군요.
코이케 그 후 브라더가 본격적으로 회복한 것은 자사 엔진의 레이저 프린터와 잉크젯 프린터를 개발하여 복합기로 전개할 수 있게 된 1990년대 후반입니다. 현재 통신·프린팅 기기 등을 다루는 프린팅 앤드 솔루션즈 사업은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주력 사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협업 및 대량 생산·합리화로 위기를 극복하다
오오타니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코이케 하나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OSS 등 판매 파트너를 개척하여 그들의 성장과 함께 브라더도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시장에서 톱 셰어를 차지하고, 많은 제품을 글로벌하게 제공하는 방식의 대량 생산 · 대량 판매 추구입니다. 브라더에는 원래 자급자족 주의라는 발상이 있어 많은 부품을 자사에서 제조했지만, 비용 절감을 위해 내제를 그만두고 거래처에서 구매하는 방식으로 바꾸었습니다. 정보기기 업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매출 규모, 즉 수량 싸움이 되므로, 생산 체제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토너·잉크·라벨·테이프 등 소모품 판매도 매우 중요합니다. 많은 고객이 제품 본체를 만족스럽게 사용함으로써 소모품 판매가 확대되고, 수익이 안정된 것입니다.
오오타니 그 후는 순조로웠나요?
코이케 아니요, 꼭 그렇지 만은 않습니다. 2000년 미국 법인 사장으로 취임했을 당시, 미주 연결 결산이 3년 연속 적자였습니다. 매출 채권 회수와 과잉 재고 처리, 물류 합리화 등에 동분서주하면서 북미부터 중남미까지 모든 미주 비즈니스를 재건하여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오오타니 실제로는 과감한 투자와 합리화도 단행하셨군요.
코이케 테네시주에 거대한 창고를 짓고, 제조·물류·서비스 등 모든 기능을 한 곳에 집약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제가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국내에서는 1999년에 설립 이래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브라더 판매를 흡수 합병하고 많은 영업 인원을 정리하기도 했습니다. 사업은 사람이 있어야 성립합니다. 브라더가 오늘 있는 것은, 과거에 희생을 치르고 힘든 경험을 하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M&A에서도 중시해온 파트너와의 시너지 효과
오오타니 일본으로 귀국하신 것은 2005년, 부임으로부터 23년 후였습니다.
코이케 당시 일본의 브라더는 미국에서의 비즈니스 모델을 역수입하는 형태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귀국 후 프린팅 사업 책임자 등을 거쳐, 2007년 브라더 공업 사장에 취임했습니다. 그 직후에 리먼 쇼크가 찾아왔습니다.
오오타니 당시 생산이나 판매 축소도 검토하셨나요?
코이케 주위 동종업계 타사들은 생산 축소나 공장 폐쇄 등을 하고 있었지만, 당사는 그 노선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브라더는 원래부터 SOHO 고객에게 주안점을 두고, 프린터·팩스·복사 등의 기능을 갖추면서도 가격이 적당하고 컴팩트한 제품을 제공해 왔습니다. 2001년에 발생한 미국 동시다발 테러 이후 자택이나 소규모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브라더 제품이 많이 선택되었습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리먼 쇼크 때도 같은 경향이 나타날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판단은 결코 감과 경험으로만 내린 것이 아닙니다. 미국 주재 시절에는 주요 양판점의 판매 데이터를 빠짐없이 확인하고, 수치를 바탕으로 수요에 맞게 대처해 왔습니다. 2008년 당시에도 판매 자체는 오히려 견조하여, 생산을 줄일 이유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판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오타니 M&A에도 적극적으로 임하셨습니다.
코이케 그 후 오피스용 프린팅 사업은 성숙기를 맞이하여, 산업용 영역의 성장을 중심으로 한 사업 포트폴리오 강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만, 새로운 일을 시작하더라도 자체적으로 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제조 경험과 기술에서 시너지가 있고, 장기적으로는 판매 채널도 통합할 수 있는 분야의 파트너를 찾아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15년에 단행한 도미노사 인수는, 소비자용에서 키운 잉크젯 기술을 산업용에 활용한다는 발상이었습니다.
오오타니 그야말로 기술의 시너지가 살아난 것이군요.
코이케 나아가 도미노 사업도 매출의 절반 이상이 소모품과 서비스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품만 판매하면 수요가 떨어지는 순간 손익에 영향을 미치지만, 소모품과 서비스를 일체화하여 고객에게 제공함으로써 비즈니스에 지속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만,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고객의 기대에 계속 부응하는 당연한 일을 게을리하면, 피해가 보디 블로(body blow)처럼 덮쳐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글로벌 시대야말로 시야를 높이는 경험을
오오타니 코이케 씨 본인은 일본 제조업의 앞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코이케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인한 노동 인구 축소는 명확하므로, 철저한 자동화를 포함한 제조 방식을 생각해 나가야 합니다. 그에 더해, 비즈니스 성장을 지속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차원에서의 추가 성장이 불가피합니다. 조직 내의 다양성은 매우 중요한 주제로, 일본에서는 다양성을 접하며 일하고, 항상 아이디어를 구하여 비즈니스에 활용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오타니 인재 육성에서 코이케 씨가 임하고 계신 것이 있으신가요?
코이케 꼽자면 「테리의 챌린지 주쿠(Terry’s Challenge塾)」라고 할까요. 젊은 직원을 중심으로, 제가 쌓은 다양한 경험을 전하는 것 외에, 수강생이 스스로 임하고 싶은 테마를 설정하고 그것을 전 임원 앞에서 발표하여 실행해 나가는 프로그램입니다.
오오타니 코이케 씨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시나요?
코이케 기간 중 강의를 3회, 추가로 전 수강생과의 1대1도 면담도 진행합니다. 1인당 1회 30분, 최소 3회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적이 엄격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성장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진검 승부입니다. 또한 수강생들은 졸업 후에도 같은 기수 동기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서로 연마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브라더는 제가 입사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직이 성장했습니다. 회사가 커지면 부문 간 벽, 조직 간 벽이 어쩔 수 없이 생깁니다. 젊은 여러분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접촉함으로써 부문을 넘어선 사내외 네트워크를 넓히고, 성장해 나가길 바랍니다.
# 인터뷰 진행자 : JMAC 대표이사 사장 오오타니 요헤이
※ 본 글은 JMAC 발행 『Business Insights』 80호에서 전재 한 것입니다.
※ 회사명, 직함 등은 발행 당시 기준입니다.


